한국에서 떠나기 일주일 전, 나의 오래된 중학생 친구들을 만났다.
처음 유학길에 오를 때도 나에게 양귀자의 <모순>을 선물해주어 미국에 갖고 왔는데 <가녀장의 시대>도 나의 미국 책장에 꽂힌 두 번째 한국 책이 되었다.
역시 내 독서 취향을 너무나도 잘 아는 친구 덕에 책장 넘기기가 아쉬워하며 책을 읽었다.
비행기가 결항되어 이륙 시간보다 여섯 시간이나 먼저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쳐야 하던 그 때,
카트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을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하다 겨우 오늘에서야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책 표지에 떡하니 적힌 "이슬아 장편소설"이라는 문구를 무시한 채 '이슬아' 작가가 정말 이렇게 사는 줄 알고 놀래하며 책을 읽었다.
그러던 중에 인스타그램에 결혼까지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어 '그럼 내가 읽고 있는건 뭐야?'라고 다시 책표지를 봤더니 이 책은 허구의 소설이었다.
작가님의 경험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를 넘나드는 소설이겠지.
가부장 사회에서 뿌리깊게 박힌 한국의 문화를 소설로 담아낸 작가의 글 속에서 나도 모르게 공감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책에서, 현실에서, TV에서, 유투브에서 수없이도 많이 봤던, 어쩌면 이제는 안봐도 비디오인 가부장의 모습을 이런 형식을 접하니 색다르면서도 답답했다.
복희의 엄마부터 겪었던 삶이 아직도 내 주변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직 현재 진행형이겠지.
과연 이 가부장의 '부'에서 '녀'자로 바꾼 이야기를 얼마나 많은 세대와 다양한 사람들이 볼 수 있을까?
또 여자들만 열심히 소리치고 문제삼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언제쯤이면 이런 이야기가 유치해질까.
"에이, 또 가부장 이야기야?"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외치는 자들은 이 이야기를 읽고서 진부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편가르기가 넘쳐나고 내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해 젠더 갈등이 한창일 때 나는 한국을 떠나왔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서 부푼 마음을 안고서 상경한 나는 2013년 이화여대 입학식에 참석했었다.
집으로 돌아와 떡하니 네이버 메인에 '이화여대 입학식'이 걸려있고, 그 밑에 희롱과 갖가지 욕이 달려있었던 현실에 충격 받았던 날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했고 덕분에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 뿐인데 왜 우리학교만 이렇게 메인에 걸려서 욕을 먹지?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그런 우리에게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미 이 세상이 평등하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교수님들은 자연스럽게 숨겨져있던 여성들, 왜 여성들이 소수인것인가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 정치, 철학, 예술 할 것 없이 문제의식을 갖게 해주셨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분노하는 자와 문제삼지 않는 자들로 나뉘었다.
그때 나는 단순히 우리 학교만 이 세상이 평등하지 못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지 않구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맞서 싸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길이 외롭지도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회에 나갔을 때, 세상은 너무나도 불평등했고 답답했다.
그 답답함이 지금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언젠가는 이 이야기가 유치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인터넷에서 밈으로 돌아다니는 "할머니 제발 그만하세요!"처럼 너무 구시대적이어서 다신 생각하지 않아도 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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