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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 라이프/고민

<선재 업고 튀어>에 빠진 근황 + 마음에 드는 칼럼

나의 친한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 요새 자주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다.  <선재 업고 튀어>, 제목부터 뭔가 중고딩 시절의 팬카페 닉넴같았는데 역시나 90년대생 향수를 자극하는 영상미로 주목을 끌었다고 한다. '하이틴 불패 신화'를 외치는 친구들에 이끌려 하루 만에 6회를 모두 보았고 '선업튀'에 빠진 사람들처럼 난생 처음으로 '월요일'이 기다려지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선업튀'를 끊임없이 찾아보고 친구들이랑 떠들고 유튜브 알고리즘에 선업튀 관련 컨텐츠가 하나 둘 씩 뜨기 시작한다. '선업튀'로 한창 구글링을 하던 중 이진송 작가의 글을 마주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이진송' 작가를 좋아한다. 처음 이진송 작가를 알게된 것은 학부생 때 '여성학' 수업에서였다. 교수님께서 초청 강연자로 이진송 작가를 초대해 주셔서 <계간 홀로>도 알게되고 <연애하지 않을 자유>라는 책도 알게 되었다. 계간 홀로는 한국에 있을 때 신간이 나올 때마다 펀딩을 통해 구매해 읽을 수 있었는데 친구랑 서로 닉네임 찾아서 키득대던 때도 있었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에서는 '홀로'라는 정의를 읽으며 깊게 공감한 적도 있었다. 내가 느끼지 못하던 "남녀연애"라는 틀 안에서 행해지는 다양성의 무시와 사회가 우리에게 가해지는 촘촘한 선입견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작가의 필력에 빵빵 터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드는 그런 책. 구글에서 미리보기 38페이지를 제공하니 관심이 있다면 한 번 펼쳐보는 것도 추천한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연애하지 않을 자유: 행복한 비연애생활자를 위한 본격 싱글학Book21 Publishing Group, 2016. 4. 29. - 312페이지 ◎ 도서 소개지금 연애하지 않는 자, 모두 무죄!국내 최초 비연애 칼럼니스트 이진송의  

books.google.co.kr

2013년에 대학을 입학해 '여혐'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자연스레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들도 '여성학' 수업은 1,2학년 때보다는 3,4학년에 가서야 듣는 것을 추천하곤 했다.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 인권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기에도 대학에 있어서 내가 답답함을 느낀 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깨닫게 된 것 같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어른으로서의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가 너무나도 격변의 대한민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내 정체성 형성에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오면서 더 이상 계간 홀로를 구매하지 못했지만 참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을 쓰고, 또 다른 작가들로 부터 글을 받아 엮어 놓은 서적이다. 작가가 제시한 '홀로'라는 개념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정의되고 논의되는 현상을 보면서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기도 했다. 

 

다시 선업튀 얘기로 돌아와, 우연히 마주한 이진송 작가의 글을 가져와본다. 작가의 글을 읽으려고 경향신문에 가입까지 해서 글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진송의 아니 근데]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주인공 임솔로 본…장애에 대한 닫힌 인식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덧없는 가정을 해볼 것이다. 그때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지 말걸, 병원에 좀 일찍 데려갈걸, 그날 거기에 가지 못하게 막을걸…. 그 ...

m.khan.co.kr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작가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솔이가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 장애가 사라진다면 그건 해피엔딩일까?

 

최근에 장애인으로서 미국의 다른 도시들을 다룬 처음 한솔님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한국에서 시각 장애인이 겪는 현실과 내가 이곳에서 보아온 장애인을 대하는 시각에 엄청난 갭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중에서도 엄청난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도시로 차가 있는게 짐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학교를 갈 때도, 다운타운에 갈 때도 맛집을 찾아갈 때도 웬만해서는 다 대중 교통을 이용한다. 그래서 구글 맵을 달고 사는데 늘 Delayed/Arriving Early를 볼 수 있다. 그때마다 "이럴거면 예측은 뭐하러 하냐 어짜피 다 틀릴텐데"라고 불만이 가득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늘 시간에 맞춰 오지 않는 버스에 익숙해 질 때쯤, "왜"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다. 내가 이 IT의 메카라 불리는 실리콘 벨리, 그것도 미래를 위해 끊임 없는 서비스가 쏟아져나오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데 왜 버스 시간 하나 맞추지를 못할까?라는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내가 발견한 이유는 유모차나 휠체어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로 통학하러 버스를 타고 다녔던 루트는 Golden Gate Park를 가로 지르는 노선이었다. 그때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다. 특히 아침 시간 대에는 선생님따라 형광색 조끼를 맞춰입은 아가들이 타거나 유모차를 끌고 타는 부모님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또 어쩔 때는 휠체어를 이끌고 타는 사람들, 바퀴가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타는 사람들, 하물며 생계가 모두 달려있는 짐을 잔뜩 실고 타는 홈리스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버스 기사님께서 그들이 버스에 타기 수월하도록 버스 차체 자체를 낮추는 것이다 (위 동영상에서도 나온다). 약 3-5초 정도 차를 기울이거나 차체를 낮게 해서 버스에 오르기 쉽게 하시고, 그들이 내릴 때면 다시 또 차체를 낮춰 내리기 수월하게 해주신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버스에는 자전거도 실어서 탈 수 있다. 자전거를 갖고 있는 승객은 버스 앞 쪽에 자전거를 걸고서 버스에 탑승한다. 그리고 내릴 때도 자신의 자전거를 다시 들고 가는 식으로 대중교통이 이용 가능하다. 그때마다 기사님들은 아무런 얘기 없이 그냥 조용히 기다려주신다. 어떤 승객이 타든 안전하게 모두가 타고 내리는 것이 기사님께서 항상 지키는 철칙인 것 같았다.

 

이런 모든 과정들이 버스가 예상 도착 시간보다 늦어지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금 우리나라 대중교통 현실을 떠올려 본다.  칼 같이 도착하는 한국의 버스 시스템이 편리성에 있어서 우수할 수 있으나 그 정확도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미국에 와서야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한솔님이 담아냈던 장면들 중에 휠체어를 타신 분과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솔님은 휠체어에 탄 장애인에게 저상 버스인지 물어보고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오면 하염없이 저상버스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심지어 어떤 버스 노선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탈 수 있는 저상 버스가 아예 없다. 출퇴근 시간에 장애인 시위가 벌어졌을 때도 몇몇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사람들이 복잡한 출퇴근 시간이냐'며 비난을 할 때도 장애인들은 자유로운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장애인들도 직업을 가지고 그 시간에 출퇴근을 해야한다는 사실 마저 생각을 못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비난에 시달리는 와중에 시위를 하는 당신들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정작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마음이 아팠다.


그런 점에서 <선재 업고 튀어>를 재밌게 보고 있는 시청자라면 이진송 작가의 글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좋겠다. 글에서 작가가 소개한 '접힌 시간성'에 대한 개념이 뇌리에 꽂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 저자는 “현재 위에 과거와 미래가 겹치면서 장애가 초현실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접힌 시간성(folded temporalities)”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접힌 시간성은 “정상적인 과거로 현재를 대신”하고, “동시에 특정한 종류의 정상적인 미래를 현재에 투영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현 상태를 공고히 한다. “ - 글 중

 

나는 이 '접힌 시간성'에 대한 짧은 토막을 '장애'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닌 '장애'를 없애버리는 사회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해 말하는 버스가 생겨나고 하차 버튼 대신에 버스 창가에 어디에 앉아있든 접근할 수 있는 줄이 있고,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해 저상버스가 개발되고 기사님이 차체를 기울여주는 그런 사회가 아닌,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는 '장애'를 '정상화' 범주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장애를 '치유'하는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렇게 현재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옳은 방향일까. 그렇다면 과연 '정상'의 범주는 무엇인가로 글이 연결되며 누구에게나 있을 결함을 언급하며 수용과 정체화의 자연스러움을 언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1화에서 나온 휠체어를 타는 솔이를 통해 계단이 있는 회사에 취직을 못하고 좌절해야하는 현실, (버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극 중에 나오진 않았지만 어쩌면 몇 없는 저상 버스를 기다리다) 대중 교통을 타다 어쩌면 마지막이었을 수 있는 최애의 마지막 콘서트 직관을 놓쳐버린 현실과 대비해 장애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곧 해피 엔딩일 수 있다는 짐작의 뒷면을 생각하게 된다. 드라마이기에 후천적 장애가 과거를 돌려 고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선천적 장애는 가진 이들은 이를 통해 위로를 받기 보다는 상처는 아닐지, 애정하며 지켜보는 <선재 업고 튀어>가 접힌 시간성의 개념을 더욱 공고히 해버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스러움이 든다. 물론 이 걱정 이전에, 원작에도 없는 솔이가 장애인이 되는 설정을 추가한 작가와 연출진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러한 설정 덕분에 스토리의 풍부함을 선사해주었고 시청자로 하여금 장애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이진송 작가의 글이 이런 방향으로 쓰여질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사진은 주말에 다녀온 Lands Ends Trail 그냥 예뻐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한창 인기였을 때, 우영우의 실제 사례라고 불리는 미국인을 인터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영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미국인인가?"이다. 한국 드라마의 모델을 왜 꼭 미국에서만 찾아야만 했을까. 정말 한국에는 자폐 변호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인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공감대를 가진다. 인종, 국가, 나이, 성별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또 더 다양한 사회를 위해 나아가는 중이다. "STEM분야에서의 아시아 여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던 나의 대학원 에세이에서도 밝혔듯 나는 나 자신을 소수로 정체화 하여 이 땅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경험하며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의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꿔보고 싶다는 나의 열망도 내비쳤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정체화를 나의 결함으로 연결시켜 좌절하고 있지 않다. 정체화를 통해 내가 사회를 바꿀 방법을 찾고 어떻게 하면 더 멀리, 더 높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나의 정체화가 결함이 아니듯, 장애인의 정체화가 결함이 아닐 사회를 꿈꿔본다.